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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시문(丁若鏞 先生 詩文 拔萃)


丁若鏞 先生 漢文 讀音 및 韓譯

200여년 전 우리말이 지금과 많이 다르고, 특히 茶山公의 漢文 詩는 뜻이 깊어서, 그 시가 읊어지던 당시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나이와, 장소와, 심정과, 주변 관계인물, 등에 대한 상황 인식이 전제되어야 본 뜻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언어감각에 좀더 근접한 전달을 위하여 역술이 불가피하다. 우선 고전국역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 학자들의 번역문을 거의 그대로 적으며 일부 덧붙이기도 하였다.
다만, 天眞消搖集을 좀 관심있게 읽어가며 따져보노라면, 그 많은 詩文이 비록 同行하였던, 옛 친구들, 石泉, 玄谿 와, 3가정의 아들들과 수행원들 즉, 學淵, 季林, 聖九, 規伯, 載宏, 命淵, 鍾儒, 楊山, 民燮, 東錫, 등, 同行者들과 隨行者들의 이름으로 쓰여진 것처럼 되어 있지만, 詩文 내용을 보면, 대부분 모두 丁若鏞 先生 자신의 글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문맥 뿐 아니라, 내용도, 예컨대, 제주도에서 流配生活하는 조카 딸, 命連은 1838년에 세상을 떠나는데, 1827년에 막내 작은 아버지 丁若鏞 先生과함께 천진암에 올 수도 없으니, 혹시라도 流配 중에 해가 미칠까 이름을 命淵으로 은익시키기도 한것 같으며, 또 아들 學淵이 지은 시문 내용은 나이로 봐서 5세 전후에 천진암에 와서 어른답게 지낸 일을 소시적 추억으로 作詩할 수가 없으니, 30여년을 거론하는 것이 몇차례 나오는데, 이역시 정약용 선생한테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추후, 일일이 재논증할 것이다. 그래서 漢詩는, 특히, 丁若鏞 先生의 漢文詩는, 글자만 보고 풀이하거나, 단어만 가지고 해석하거나, 문장만 들여다보면서 讀解하려고 해서는 안되다.
완전한 독해와 현대어로의 번역은 세월이 좀 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들을 우선 번역하여 내고 있는 여러 기관의 전문 학자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마음을 잊지 말자. 우선 우리 천주교 신앙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소개한다.

韓國天主敎會 創立者 李檗 曠菴公과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 聖地에 관한 俟菴 丁若鏞 先生 漢詩의 現代文 飜譯

贈李檗

二儀雖不改 이의수불개
七曜迭舒卷 칠요질서권
嘉木敷春榮 가목부춘영
華滋亦易變 화자역이변
倥傯被驅迫 공총피구박
不能訴餘戀 불능소여연
庶物無偏頗 서물무편파
貴達安所羨 귀달안소선
賢豪氣相投 현호기상투
親篤欣情眄 친독흔정면
令德勉早修 영덕면조수
慷慨常見面 강개상견면

[贈李檗] 이벽에게 드림.

<1777년, 정유년에 정약용 선생이 15세 때, 천진암에서 독서하시는 23세의 이벽 광암 공에게 지어 바친 시. 이 때 이벽 성조의 새로운 지식과 그 가르침은 당시 젊은 선비들에게는 감탄과 환영을 받았으나, 보수적인 유림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음양 두 가지는 비록 고칠 수 없는 것이지만,
일월화수목금토, 일곱 요일은 차례로 자리바꿈하고,
봄이 되면 나무도 새 움을 틔워 아름답게 만발하며,
꽃도 피고 지며 또다시 다르게 변하여 성장하고 있도다.
광암 공의 새로운 가르침이 공격과 비난으로 난처해져도,
연민의 정으로 차마 상대방 면박이나 반격은 피하며,
인간차별 아니하고, 만사에 편파적이지 않으시도다.
그렇다고 인기나 존경, 부귀와 공명은 전혀 부러워하지 아니하시며,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골고루 다 지니고 계시어,
친절하고도 진지하며 정감이 충만하시도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가정을 떠나 학문과 수덕에 몰두하시니,
위엄과 온화를 겸한 모습 항상 그 얼굴에 풍기며 흘러넘치시도다.

同友人 李德操 檗 乘舟入京

<1784년 갑진년 봄, 27세의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한 후, 30세 되던 이벽 광암 공이 15년간(1770~1784) 머물던 수학 도장 천진암의 독서처 본거지를 서울 수표동 광암 공 자택으로 옮기던 날, 22세의 정약용 선생이 이벽 광암 공 의 두미 시골집 두미협 나루터에서 승주입경하며 지은 시다.>

啼樹黃鸝逆客船 제수황리역객선
水邊村落始朝煙 수변촌락시조연
春深兩岸看紅雨 춘심양안간홍우
風靜中流俯鏡天 풍정중류부경천
蘇軾才高談水月 소식재고담수월
李膺名重若神仙 이응명중약신선
深知拙劣絡無賴 심지졸렬락무뢰
欲把殘經報昔賢 욕파잔경보석현

벗 이덕조 벽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함께 들어가면서.

환송례의 합창가처럼, 숲속 꾀꼬리들의 노래소리 뒤로하고, 우리 나그네들 태운 배는 이른 아침 떠나는데 /
환송식의 축포 연기처럼, 강 가의 마을에는 아침 연기 피어오르고 있네 /
환송 길에 화동들이 꽃 뿌리듯, 봄은 이미 무르익어 강 양쪽 기슭의 복사꽃잎이 붉은 비처럼 내리는구나! /
강바람조차 오늘은 고요히 자니, 흐르던 강물도 잔잔하여 거울같아 하늘이 물 속에 들어있네그려 /
일찍이 하늘 일과 땅의 일을 익히 알고, 달과 물을 노래하던, 그 옛날 中原의 박학다식한 천재 시인 소식처럼,
환송하는 백성들의 수레가 백리 길에 줄지어 늘어섰던, 중원의 그 옛날 입산 길의 신선 도사 이응처럼 /
광암공은 학덕을 겸비한 대도사이나, 나는 재능도 인망도 너무도 모자라니 /
광암공과 옛 성현들이 남긴 글이나 읽어 성현과 도사님들께 보답할까 하노라.

友人 李德操 輓詞

<1785년 정약용 23세 때, 이벽 성조께서 문중과 가정의 혹심한 박해로 인하여 32세에 순교하시자, 그 장례식에 와서 지은 조시이다.>

仙鶴下人間 선학하인간
軒然見風神 헌연견풍신
羽翮皎如雪 우핵교여설
鷄鶩生嫌嗔 계목생혐진
鳴聲動九霄 명성동구소
嘹亮出風塵 료량출풍진
乘秋忽飛去 승추홀비거
怊悵空勞人 초창공로인

벗 이덕조의 장례식에서 지은 만사.

신선나라 학이 인간세계에 내려오니 /
그 찬연한 모습에서 신의 풍채를 보았도다 /
그 학의 깃털과 날개가 모두 눈처럼 힌 색이었기에 /
닭과 오리떼들이 모두 시새움하며 골을 부리었지 /
하늘을 향한 울음소리는 아홉하늘까지 높이 울려 퍼져나갔고 /
땅을 향한 울부짖던 그 맑고 밝은 우렁찬 목소리는 풍진에 뛰어났었네 /
가을이 되어 찬바람 타고 문득 훌쩍 날아가 버리니 /
이제 와서 우리 모두 아무리 애닲아한들 무슨 소용있으랴!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

<1797년 정약용 35세 때 천진암에서 지음.>

重巒蓊藯一蹊微 중만옹위일혜미
濃綠深黃弄晩暉 농록심황롱만휘
桑葉欲肥鳩正乳 상엽욕비구정유
麥芒初長雉交飛 맥망초장치교비
春燒古棧迷僧徑 춘소고잔미승경
晴瀑危橋濺客衣 청폭위교천객의
知有人家深處住 지유인가심처주
隔溪聞喚女兒歸 격계문환여아귀
楊子峯頭草木蓁 양자봉두초목진
白雲飛盡綠嶙峋 백운비진록린순
蒼鼯度樹鶯先避 창오도수앵선피
文豹行林鵲亂嗔 문표행림작난진

단오날 두 분 형님들과 함께 천진암에 가서 놀면서.

천진암 가는 길은 울창한 산림 속으로 계곡 물도랑가의 오솔길 하나뿐인데 /
싱싱한 짙은 녹음은 한껏 젊은 양, 석양에 지는 해를 놀리는듯 하네 /
뽕잎이 두툼하게 퍼지면 비둘기들은 둥지에 알을 낳고 /
보리이삭 패며는 꿩들은 짝지으려 날기에 바빠서 번갈아 울어대네 /
옛 길목이 봄 불에 타버려서, 스님들만이 다니던 길마저 불분명한데 /
계곡의 폭포수는 비오듯하여 이 맑은 날에도 나그네 옷을 적시네 /
사람이 있는 것을보니, 이렇듯 깊은 산골에도 사람들 살곳이 있는가보다!
개울 건너서 이름 부르는 소리 들리더니 여아가 돌아오고 있구나 /
양자봉 상상봉 쪽의 초목들은 무성한데 /
흰구름이 두둥실 바람에 날아서 지나가니 겹겹이 푸른 봉우리로세 /
날다람쥐 날으듯 나무를 타고 오르면 꾀꼬리들이 먼저 날아 피하고 /
담비와 시라소니 숲 속에서 어슬렁거리자 까치떼들 골부리며 짖어대는구나.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

1797년 정약용 35세 때 천진암에서 작

磴路時逢挑菜女 등로시봉도채녀
巖扉日送賞花人 암비일송상화인
臨流濯足知何意 임류탁족지하의
曾踏東華萬斛塵 증답동화만곡진
巖阿層疊抱祇林 암아층첩포기림
經卷香爐深復深 경권향노심복심
澗草雜靑黃綠色 간초잡청황녹색
山禽交十百千音 산금교십백천음
李檗讀書猶有處 이벽독서유유처
苑公棲跡杳難尋 원공서적묘난심
風流文采須靈境 풍류문채수영경
半日行杯半日吟 반일행배반일음

단오날 두 분 형님들과 함께 천진암에 가서 놀면서.

비탈길 오르노라면, 나물 캐는 아낙네들 만나보게 되고 /
기둥삼아 세운 바위돌 대문에 해가 지니, 꽃구경 춘객들 돌아가려네 /
흐르는 또랑물에 발 담그고 씻는 뜻을 그대는 알리오만 /
중원의 동쪽과 조선 땅 밟으며 묻은 온갖 먼지 너무나 많다오 /
바위 언덕은 첩첩이 치성 올리는 산사를 품에 안고 있는데 /
불경과 공양 향로는 이렇듯 아주 깊은 산속에까지 이미 와 있구나 /
실 또랑 물가의 풀들은 청 황 녹색으로 뒤엉켜 있는데 /
멧새 떼들은 열가지 백가지 천가지 목소리로 번갈아 울어주네 /
이벽의 독서처는 아직도 저기 아직 그대로 있는데 /
원공이 깃들이던 자취는 아득하여 다시 찾아보기 어렵도다 /
풍류와 문채는 모름지기 신비로운 경지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려니 /
그 옛날 그리워 한나절 내 술 마시고, 또 한나절 내 시를 읊어 보노라.


寺夕

1797년 정약용 35세 때 天眞菴에서 作

落日隱脩杪 낙일은수초
池光幽可憐 지광유가련
新蒲猶臥水 신포유와수
疏柳正含煙 소유정함연
小滴遙承筧 소적요승견
餘流暗入田 여류암입전
誰將好丘壑 수장호구학
留與數僧專 유여수승전
纖月風林外 섬월풍임외
幽泉露碓邊 유천로대변
巖巒收氣色 암만수기색
籬塢積雲煙 리오적운연

천진암에서 저녁을 지내면서.

지는 해는 긴 나무 끝에 숨고 /
작은 웅덩이 물빛은 귀엽기도 하구나 /
새로 피어난 부들 풀은 물 위에 둥둥 떠 누워 있는네 /
듬성듬성 있는 버들강아지 꽃봉오리 뽀얀 연기 같구나 /
멀리서부터 홈통으로 졸졸 흐르는 물줄기는 /
작은 막은 또랑 봇둑에 차고 넘쳐서 /
은연중 흘러서 전답으로 스며들어 흙을 적시네 /
저 자연 암반의 굄물방아확은 /
장차 누구라도 좋아하여 가져다 쓰지 않으랴 /
저렇게 좋은 것을 어찌 몇몇 스님들만 독차지하여 쓰게 하랴?

寺夕

1797년 정약용 35세 때 天眞菴에서 作

鍾動隨僧粥 종동수승죽
香銷伴客眠 향소반객면
潛嗟古賢達 잠차고현달
多少愛逃禪 다소애도선
百鳥眠皆穩 백조면개온
悲鳴獨子規 비명독자규
畸孤寧有匹 기고녕유필
棲息苦無枝 서식고무지
眇眇春風憶 묘묘춘풍억
蒼蒼夜色疑 창창야색의
月沈人正睡 월심인정수
淸絶竟誰知 청절경수지

천진암에서 저녁을 지내면서.

바위도 산도 기색이 고요히 잠잠한데 /
울타리와 둑은 구름과 연기에 싸여 있네 /
종소리 맞춰 스님들은 죽을 먹고 /
향은 꺼져 객과 함께 잠들었구나! /
슬프다. 그 옛날 어질고 통달한 사람들 /
적지 않은 이들이 참선하기 피하기를 즐겼지 /
새들은 모두 다 깊이 잠들어 숨은듯한데 /
아직도 자규만이 구슬피 울고 있으니 /
짝이 있어도 외로움은 없지 않은 모양이로다 /
집지어 깃들일 마땅한 나뭇가지 없는 터이니 /
봄바람 불면 옛 추억에 잠기고 /
창창한 밤이면 더 불안하도다 /
달은 지고 사람도 다 잠들면 /
맑고 푸른 이 경치를 누가 알아주랴?

早起

1797년 정약용 35세 때 天眞菴에서 作

木魚纔動起經僧 목어재동기경승
雲巘蒼蒼曉氣澄 운헌창창효기징
日照石林生異色 일조석림생이색
煙橫山阪有餘層 연횡산판유여층
漸看游鹿穿脩杪 점간유녹천수초
復放啼禽集古藤 복방제금집고등
遠憶西京諸學士 원억서경제학사
翩翩歸騎自園陵 편편귀기자원능

- 천진암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

<*1797년 정약용 35세 때, 궁중에서 우부승지, 좌부승지, 부호군, 등 현직을 역임하던 시절, 천진암에 와서 2일간 머물면서 지은 詩>

목어 소리 들리자 스님은 일어나 독경하는데 /
산 봉우리 구름 창창하여 아직 이른 새벽이로다 /
돌과 나무를 해가 비추니 이상한 빛을 내고 /
산언덕에 연기가 띠 둘러서 층계가 또 생겼구나! /
긴 숲을 뚫고 뛰며 노는 사슴 보이더니 /
이윽고 새들은 다래 넝쿨에 또 모여 지저귀네 /
서경의 학사들을 멀리서 생각하니 /
말타고 원릉에서 돌아오고 있으리.

山中感懷

1797년 정약용 35세 때 天眞菴에서 作

娟妙鶯峯色 연묘앵봉색
終朝在檻頭 종조재함두
未留棲隱約 미유서은약
如有別離愁 여유별이수
藥草經春長 약초경춘장
林花入水流 임화입수류
滔滔丘壑志 도도구학지
不是愛娛游 불시애오유
山中春事晩 산중춘사만
五月見黃薇 오월견황미
花落山風起 화락산풍기
飄飄上客衣 표표상객의

- 천진암 뒤 산속을 거닐며 느낀 심정 -
<*1797년 정약용 35세 때, 궁중에서 우부승지, 좌부승지, 부호군, 등 현직을 역임하던 시절, 천진암에 와서 2일간 머물면서 지은 詩>

앵자봉 모습은 곱고도 오묘한데 /
아침은 난간머리에서 마치고 있구나 /
숨어 살자는 언약이 없어선지 /
이별의 시름에 잠겨있는 듯하이 /
약초는 봄을 지나며 자라고 /
숲속의 꽃들은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네 /
걷잡을 수 없는 예서 살고 싶은 뜻은 /
무작정 놀기 좋아서가 아니네 /
산중에 봄이 좀 늦었던지 /
오월에 새로 돋는 고비를 보겠네 /
꽃은 지고 산바람 일어 /
객의 옷자락을 추켜 마구 올리고 있구나.



天眞消搖集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病伏十有二旬適逢玄谿令公從龍門水鍾而至將南游天眞菴 勉而從之 仍訪石泉翁偕適 三家少年及季林聖九規伯亦從焉 到水南作 병복십유이순적봉현계령공종용문수종이지장남유천진암 면이종지 잉방석천옹해적 삼가소년급계임성구규백역종언 도수남작] 洌樵(열초)

名士看山話 명사간산화
欣然動我心 흔연동아심
時宜唯漫浪 시의유만낭
天性況山林 천성황산림
沙暖春蕪遠 사난춘무원
峯稠晩翠深行處有繁陰 봉조만취심행처유번음

천진암에 와서 노닐며 읊은 시문집.

[일백이십 일 동안을 아파 누웠다가 /
마침 용문산에서 수종사를 거쳐 온 현계, 영공이 왔는데 /
영공의 말은 장차 남쪽으로 천진암에 가서 노닐고자 하므로 /
애써 영공을 따라 나섰다 /
또한 석천 옹을 방문하여 함께 갔는데 /
우리 세 집의 소년들과 계림ㆍ성구ㆍ규백도 따라갔다. 강 건너 남쪽에 이르러 먼저 한 수를 읊었다]

산 구경 하자는 명사의 이야기가 /
내 마음을 혼연히 감동시켰네 /
지금 사정은 유랑하는 것뿐이려니와 /
사실은 나 역시 천성이 산림을 좋아하도다 /
백사장이 따스하니 봄풀이 벌써 무성하고 /
봉우리 조밀하니 산림이 모두 푸르구나! /
근력 부친 것 걱정할 것 없으니 /
가는 곳마다 짙은 그늘 있기 때문이다.

次韻上天眞寺 石泉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適莫非吾道 적막비오도
從他不住心 종타부주심
倂騎貪佛日 병기탐불일
隨意坐禪林 수의좌선림
疊崿藏菴古 첩악장암고
高雲引客深 고운인객심
依遲出谷晩 의지출곡만
不覺四山陰 불각사산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석천]

적막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가 아니고 /
남들 따라다니며 마음을 붙이지도 않네 /
말고삐 쥐고 나란히 불일을 즐기기도 하고 /
뜻이 있을 땐 참선하는 이들 틈에 끼어 앉아 있기도 하지 /
첩첩 산속이 이 암자의 옛날을 소장하고 있게 하는데 /
높은 구름이 나그네를 이렇게 깊이 끌어들이네 /
서서히 다니다 늦게서야 골짜기를 빠져 나오니 /
어느덧 사방에 산그늘이 지고 있음을 깨닫네 그려.

次韻上天眞寺 玄谿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絶俗曾非性 절속증비성
耽幽卽底心 탐유즉저심
病懷宜水石 병회의수석
閑界是雲林 한계시운림
浪跡三山遍 랑적삼산편
淸樽萬木深 청준만목심
神怡須信宿 신이수신숙
歸馬亦芳陰 귀마역방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현계]

세속을 아주 단절하는 것은 본성이 아니지만 /
고요함을 즐기는 것이 마음 밑바닥에 깔렸네 /
병든 회포이니 마땅히 물과 돌이 있는 곳이라야지 /
천상의 구름과 지상의 산림이 우리의 경계를 이루네 /
떠돌며 흘러온 발자취는 삼산을 이미 지나왔지 /
맑은 술잔은 깊은 잡목 속에 있구나 /
저신이 풀렸으니, 이제 마음놓고 잠을 자야지 /
갈 때 타고 갈 말도 풀나무 냄새 맡으며 그늘에서 쉬는구나.

次韻上天眞寺 楊山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旬五冷然善 순오냉연선
行休不悋心 행휴불린심
偶因尋蔓草 우인심만초
重覺入叢林 중각입총림
苕上煙霞祕 초상연하비
丘中歲月深 구중세월심
寅緣慙講德 인연참강덕
書帙見隨陰 서질견수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양산]

보름이나 춥게 지냈는데 그런대로 잘 견뎠지 /
이렇게 다니다가 아주 쉬게 되어도 섭섭한 마음이 없으리라 /
우연히 덩굴 풀 우거진 심산궁곡에서 헤매며 찾노라니 /
어느덧 수도하던 선비들의 모임에 들어와 있음을 거듭 깨달았도다 /
골바닥 수풀 위로 연기와 안개가 몰래 오르니 /
언덕 위 빈 집터를 보니 세월이 너무도 오래 지났구나 /
지금 새벽이면 예전처럼 덕목(삼덕송 등?)을 외우기가 차마 부끄럽지만 /
그래도 해가 지고 산그늘 내리면 전처럼 서책(기도서?)만은 보고 있네.

次韻上天眞寺 學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紅葉題詩處 홍엽제시처
重來愴客心 중래창객심
入門勸芳醑 입문권방서
落日翳喬林 낙일예교림
破碓泉聲散 파대천성산
荒寮草色深 황료초색심
伊蒲容信宿 이포용신숙
何事怕輕陰 하사파경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학연]

일찍이 붉은 잎을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짓던 이곳에 /
오래간만에 다시 와서 보니 나그네 마음만 서글퍼지네 /
문안에 발을 들여 놓으니 술동이 향기를 권하는데 /
지는 해는 나무 끝에 걸려 있구나 /
깨어진 굄물방아확에는 떨어지는 물소리만 사방에 퍼진다 /
우리가 전에 공부하던 기숙사는 폐허가 되어 잡풀만 우거져 있구나 /
잘데 없어 걱정인데 불자 대표가 오라고 하니 믿고 자야지 /
이미 해가 저물었는데 설마 우리를 해하는 무슨 일이야 생길 수 있으랴?

[*주. 천진암과 전에 자신들이 공부하던 기숙사가 다 무너지고 사람이 살지 않아 머물 수가 없는데 불자 중 이포계를 받은 열심한 불자가 자기 집으로 가자니, 설마 천주교 자신들을 관아(당시 광주 남한산성 40여리)에 알리지기야 하랴]

次韻上天眞寺 鍾儒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江湖相忘久 강호상망구
泉石獨關心 천석독관심
共渡迷津口 공도미진구
遙尋祗樹林 요심지수림
殘花一春晩 잔화일춘만
啼鳥萬山深 제조만산심
桑下緣何重 상하연하중
遲遲出洞陰 지지출동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종유]

강호의 세상 살이로 서로가 너무나 오랜 세월 잊어버리고 지나왔네 /
다만 맑은 산골 또랑물과 바위돌에만 마음이 끌리노라 /
도미진 나루터를 우리 같이 건너서 /
소풍삼이 노닐며 복이 깃든 이 심산 궁곡을 찾았도다 /
시들어가는 꽃 잎 속에 봄은 이제 다 지나가고 있는데 /
산 새 우는 소리는 산마다 울리고 있네 /
산뽕나무 그늘 밑에 모인 인연이 어찌 그리 중요하게 여기기에 /
산그늘 져서야 천천히 마을로 내려가고 있네.

[*주. 천진암 앵자산에는 산 중턱까지 골짜기마다 산뽕나무들이 많아, 그 그늘 밑에서 장시간 쉬었음을 의미한다]

次韻上天眞寺 命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丁命連은 黃嗣永 進士의 부인이고, 丁若鉉의 딸이며, 丁若鏞 선생에게는 친조카딸이며, 李檗聖祖의 외조카 딸이다. 1801년 박해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1838년에 세상을 떠나는데, 정약용은 이 조카딸이 마치 옆에 함께 있듯, 또 천진암 산중에 와서 오두막이라도 마련하여 박해를 함께 피신하며 살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Msgr. Byon)

偶到招提境 우도초제경
蕭然淨我心 소연정아심
佳辰陪杖屨 가진배장구
幽事覓雲林 유사멱운림
碧水引筒遠 벽수인통원
黃鸝隔葉深 황리격엽심
誰能割塵想 수능할진상
卜宅近峯陰 복택근봉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명연]

거닐다가 폐허가 된 천진암이 있던 경내에 이르니 /
자세가 숙연해지고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구나 /
이 기쁘고 좋은 날에 어른들 뫼시고 지팡이 자욱 밟노라니 /
어느덧 구름만이 보이는 숲속에 와서 고요히 할 일만을 하게 되는구나 /
계곡의 푸른 물은 홈통으로 끌어오는데 /
노란 꾀꼬리들은 울창한 나뭇잎 속에 갇혔구나 /
세속의 티끌 먼지 속된 생각 잘라내어 끊어 버리고 /
산 그늘 드리우는 가까이에 집터를 마련할 자 누구랴? 가까이 집을 마련하려나.

次韻上天眞寺 民燮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暇日殘春餞 가일잔춘전
玆游愜我心 자유협아심
拂衣超火宅 불의초화택
抽筆潤雲林 추필윤운림
蠟屐穿溪遠 납극천계원
禽聲引谷深 금성인곡심
名區不相負 명구불상부
家住又山陰 가주우산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민섭]

한가롭게 쉬는 이런 날 봄은 이미 다 가고 있네구려 /
이렇게 노닐며 세월을 보내니 내 마음도 무척 가볍고 즐겁구나 /
웃옷 벗어놓고 불에 탄 집 뛰어넘어 /
붓을 꺼내어 흰구름과 푸른 산림을 노래하여 더욱 빛나게 그리노라 /
계곡에 흐르는 물따라 멀리서부터 밀납신 미투리로 올라오니 /
어느덧 새들 우는 소리가 심산궁곡 깊은 골짜기까지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구나 / 경관 좋은 터전들은 서로가 가리거나 짐이 되지 않나니 /
집터도 으레히 산그늘 등지고 자리잡도다.

次韻上天眞寺 載宏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入山非喜佛 입산비희불
佳處卽怡心 가처즉이심
樵斧稀喬木 초부희교목
禪燈廢少林 선등폐소림
壞墻花發晩 괴장화발만
層筧水來深 층견수래심
丘壑平生想 구학평생상
徘徊到夕陰 배회도석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재굉]

우리가 심산에 들어온 것은 절의 부처님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
다만 경치 좋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즐겁기 때문이지 /
그러나 나무꾼들의 도끼날에 이미 큰 나무들은 없어졌고 /
참선수도의 등 사라져서 스님들이나 젊은 선비들의 모임도 없어지고 말았구나 / 무너진 담장에는 뒤늦게나마 꽃이 피어 있는데 /
층층이 이어져 내리는 홈통의 물은 그래도 곧 많이 흘러오네 /
세속을 떠난 높은 산의 깊은 골짜기는 한평생 생각하며 그리던 곳이라서 /
이리저리 오르내리며 배회하다보니 벌써 저녁 그늘속에 들어왔네.

次韻上天眞寺 東錫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寺破猶奇絶 사파유기절
淸閒卽素心 청한즉소심
幽禽棲夏木 유금서하목
急澗鬧風林 급간료풍림
碧落鐘聲斷 벽락종성단
黃昏畫壁深 황혼화벽심
詩才愧蕪拙 시재괴무졸
無計答何陰 무계답하음

[천진암에 오르며를 시제 삼아 - 동석]

절은 이미 다 무너졌지만 주변경관은 아직도 절묘하니 /
맑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바로 소박한 본심이이지 /
심산궁곡에서 사는 새들은 여름이 되면 나무에 둥지를 틀고 깃들이고 있고 /
급하게 흘러내리는 산골 또랑물은 산림 속에 찬바람 일으키네 /
푸른 하늘에 울던 절의 종소리는 사라지고 /
벽화는 황혼의 어두움에 더욱 희미하구나 /
정말 부끄럽게도 시를 읊어보는 재능이 너무 모자라니 /
이미 깃들여 서린 산그늘에 대답할 문귀가 떠오르지 않네그려.


夜宿天眞寺/寺破無舊觀 余蓋三十年重到也 洌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前躅凄迷不可求 전촉처미불가구
黃黧啼斷綠陰幽 황려제단록음유
朽筒引滴涓涓水 후통인적연연수
破瓦耕翻壘壘丘 파와경번루루구
幻境休留三宿戀 환경휴유삼숙연
名山只合一番游 명산지합일번유
且看白髮渾如此 차간백발혼여차
逝景眞同下瀨舟 서경진동하뢰주

[천진암에서 자다. 절은 이미 무너져 옛 모습 전혀 없다. 내가 다녀간 지 30년 만에 다시 왔도다. - 열초]

여기서 지내던 발자취 희미하여 다시 해볼 수 없으나 /
그윽한 녹음 속에서 꾀꼬리들만은 그 시절처럼 울다가 그치곤 하는구나 /
낡고 썩은 홈통엔 실 물 중기 끌어서 아직도 졸졸 흘러내리고 있는데 /
무너져 깨진 기와조각들은 여기저기 긁어모아 절터는 밭으로 경작하고 있네 /
환상적인 경관에서 이미 3일간이나 쉬면서 머물러 정이 드는구나 /
명산은 다 못 하루정도 지나며 놀고 가면 되도다 /
우리의 희어진 머리도 모두 이와 다를 바 없으니 /
그 볼만하던 경치도 사라짐이 배를 타고 강여울을 흘러 내려가는 것과 같구려.

次韻宿天眞寺 石泉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此身無累亦無求 차신무누역무구
浪跡因人到絶幽 낭적인인도절유
傍馬行雲隨澗道 방마행운수간도
囀鶯深樹礙林丘 전앵심수애림구
靑眸未厭引杯數 청모미염인배수
白髮還應秉燭游 백발환응병촉유
高興不愁不爛漫 고흥불수불란만
明朝更檥度迷舟 명조경의도미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석천]

이 몸에는 거리낄 것도, 남들에게 바라고 구하는 것도 없도다 /
남들 따라서 떠돌며 오다보니 수려한 산속에까지 들어왔지 /
곁에 서 있는 말은 구름이 가듯 계곡의 길 따라 가고 /
꾀꼬리 우는 소리는 산 능선 높은 언덕 위의 나무들 속에서 울리고 있네 /
젊은이는 술 마시며 몇 잔인지 세어보기 꺼려하고 /
백발의 노인들은 방에 돌아와 촛불아래서 담론하며 따지는 일로 한몫 하는구나! / 흥이 나고 무르익어 만취되지 아니할까 염려할 것 없으니 /
내일 날이 밝는 아침이면 도미진 나룻터에 타고 건너갈 배가 대령하겠지.

次韻宿天眞寺 玄谿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禪房無處舊人求 선방무처구인구
客到虛堂地自幽 객도허당지자유
藤底舂聲餘澗水 등저용성여간수
樓前寮舍半墟丘 루전료사반허구
百年地閱興衰跡 백년지열흥쇠적
三世緣深翰墨游 삼세연심한묵유
古寺重恢同普濟 고사중회동보제
艄工那乏發慈舟 소공나핍발자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현계]

옛날 선방에서 함께하던 친구들 다 갔으니, 세상 어디 간들 구해 올 수 있으랴 / 폐허가 되어 텅 빈 당 안에 객이 되어 들어서니, 마당까지도 고요하구나 /
등나무 넝쿨 우거진 아래서 굄물방아 찧던 소리는 사라지고 홈통에서 흐르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남았도다 /
전에 우리가 공부하던 누각 앞의 기숙사들은 다 무너져 절반이나 빈 터로세 /
백 년에 걸친 흥망성쇠의 흔적만을 집터만이 보여주고 있네 /
삼 세대에 걸친 인연은 필묵으로 노는 일로만 끝나가는구나 /
헌 절을 다시 보수하는 것도 중생들을 널리 구제함과 다를 바 없을텐데 /
사랑의 배 띄우는 사공처럼 어찌 이런 좋은 일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는가?

次韻宿天眞寺 學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江村儘美詎他求 강촌진미거타구
除却江村寺更幽 제각강촌사경유
走覓春光隨逝水 주멱춘광수서수
卽看雲物善層丘 즉간운물선층구
狠啼鶯請縈紆路 한제앵청영우로
緩踏驢知汗漫游 완답려지한만유
行色沓然迷去處 행색답연미거처
渡頭終日自橫舟 도두종일자횡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학연]

강촌이야 아름다운 곳이니, 더 좋은 다른 곳을 구하러 나설 필요가 있으랴만 /
강촌을 제쳐놓고 나면야 사찰이 더욱 고요한 곳이지 /
달려가서 흘러가는 물을 쫓으려 하지만 봄 경치가 멱을 막는구나 /
떠도는 구름을 보고 봉우리 위에 봉우리가 솟은 풍경 보는 것이 참으로 좋도다 / 짖꿎은 꾀꼬리 소리는 이 길로 되돌아오며 들어주길 바라는 듯 하구나 /
흐느적거리며 늘어져 걷는 노새도 낭만을 아는 듯 놀며 거닐고 있구나 /
우리 차림과 행색이 너무도 묘연하여 장차 가려는 곳이 어딘지도 분명치 않네 / 승선할 객이 없는지 나루터 배는 온종일 가로 대어 있네그려.

次韻宿天眞寺 學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黃鳥聲聲好友求 황조성성호우구
綠楊處處野居幽 록양처처야거유
芳原近水疑前渡 방원근수의전도
茅屋依山自一丘 모옥의산자일구
未信名區因我勝 미신명구인아승
卽從佳境與君游 즉종가경여군유
此行定了尋眞趣 차행정료심진취
料理東風下峽舟 료리동풍하협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학연]

새노란 꾀꼬리들 우는 소리 소리마다 각자 좋아하는 동무를 찾고 있는데 /
푸른 잎이 솟아난 버들이 늘어진 곳마다 집밖에 거하기가 조용하구나 /
풀냄새 풍기는 언덕 물가는 나루터로 여겨진다 /
산 중턱에 띠풀로 영을 엮어 지붕한 집들은 새로운 언덕과도 같네그려 /
나 때문에 명승지라 하여 유명한 이런 곳을 아직도 믿어주지 않으니 /
아름다운 경관을 따라 그대와 함께 노닐 따름이니 /
이번 소풍길에 정말로 참된 운취를 찾고야 말았으니 /
동풍에 두미협으로 내려갈 배를 미리 생각해두어야겠네.

次韻宿天眞寺 命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蕭灑安禪不外求 소쇄안선불외구
穹然洞壑窈而幽 궁연동학요이유
翻思玄度尋支遁 번사현도심지둔
猥作元方侍太丘 외작원방시태구
鞍馬渾忘半日倦 안마혼망반일권
樽醪且共一宵游 준료차공일소유
臨歸更證摩尼約 임귀경증마니약
已具東風浮海舟 이구동풍부해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명연]

소박하고 깨끗하게 편안히 참선수도하며 바깥 세계의 속된 것들을 구하러들지 말아야지 /
굴 속같이 텅 빈 산골짜기는 너무나 깊고도 적막하구나 /
문득 현도가 지둔을 찾던 일이 생각나고 /
외람되지만 원방이 태구 모시던 일을 만들어 놓은것 같구나 /
안장을 얹은 채로 서서 쉬는 말도 만사를 잊은 채 한나절을 편히 쉬네 / 동이 술로 또다시 밤새도록 노는도다 /
집에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마니산에 다시 오를 것을 약속하고 나니 /
동풍 타고 바다에까지 뜰 배가 이미 기다리고 있도다.

次韻宿天眞寺 載宏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招邀芳夏氣相求 초요방하기상구
眉宇相看水石幽 미우상간수석유
不盡浮嵐迎疊嶂 부진부람영첩장
無邊漲綠緬高丘 무변창록면고구
堪憐酒裏賢豪見 감련주이현호견
誰識山中宰相游 수식산중재상유
自去自來從所好 자거자래종소호
百年心事付孤舟 백년심사부고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재굉]

꽃향기 풍기는 이 여름에 우리 서로 만나서 기백을 찾는구려 /
눈썹 같은 산골 초가 안에서 흐르는 계곡 물과 불변의 바위를 같이 바라보았으니 / 바람 위에 떠있는 듯한 산봉우리는 첩첩이 서서있네 /
한없는 푸른 수목은 높은 산 봉우리에까지 빽빽이 들어서 있구나 /
술 한잔 주고 받으며 성현다운 호걸들을 보는 것도 사랑스럽거니와 /
심산궁곡에서 재상과 함께 놀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
스스로 가고 오며, 각자 좋아하는 바를 따라 살 뿐이니 /
인생 백년의 심사를 외로운 배에 부쳤네.

次韻宿天眞寺 玄谿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芳陰淸賞趁鶯求 방음청상진앵구
浩蕩橫江意却幽 호탕횡강의각유
蠟屐風流今白髮 랍극풍류금백발
羽衣消息又丹丘 우의소식우단구
龍門晩築探奇勝 용문만축탐기승
楊子禪房訪舊游 양자선방방구유
一棹開來前路易 일도개래전로역
迷津誰復謾招舟 미진수복만초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현계]

풀 냄새 향기 속에 그늘도 맑은데서 꾀꼬리 쫓아서 찾아 바라보며 /
넓고 자유자재하는 마음으로 강을 건너고 나니 생각과 뜻이 고요해지는구나 /
밀납 칠한 나막신 신고 풍류를 읊다보니 벌써 백발이 되었는데 /
새들의 날개같은 옷을 두른 신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 또한 저 큰 붉은 봉우리에나 가야지 /
기묘한 경관을 찾아 용문산에서는 뒤늦게나마 집을 지었고 /
양자산 선방에 가서는 옛 친구들을 방문하여 함께 놀았네 /
노 한번 저어 가면 뱃길 같이 앞길이 바뀔 것인데 /
도미진 나루에 가서 누가 또 배를 불러 놓을 것은 없지 않은가.

次韻宿天眞寺 玄谿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囂塵妨却此心求 효진방각차심구
每向虛林愛境幽 매향허림애경유
密樹陰邊聆細瀑 밀수음변령세폭
古藤圓處識高丘 고등원처식고구
諸公老去隨年少 제공노거수년소
尊佛春殘喜客游 존불춘잔희객유
三十年來重到客 삼십년래중도객
猶然苦海一孤舟 유연고해일고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현계]

풍진세상은 이런 내 본 마음 찾는데 걸리적 거리는 장애물이 될 뿐이니 /
번번이 텅 빈 산림을 찾아와 고요한 경지를 사랑할 뿐이지 /
빽빽한 숲 그늘가에는 작은 폭포 물소리만 들리는데 /
오래 묵은 등넝쿨이 둥글둥글하게 얽힌 곳은 바로 높은 언덕이로다 /
모든 선비들은 늙어가서 이제는 나이 어린 젊은이들을 따르게 마련이고 /
불상들은 봄이 다 갈 때쯤이면 찾아오는 손님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지 /
삼십 년 만에 나그네로 이곳을 다시 찾으니 /
나는 그제나 이제나 아직도 괴로운 바다의 외로운 배 한척의 신세로세.

次韻宿天眞寺 鍾儒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可對靑山何所求 가대청산하소구
靜聽流水愛淸幽 정청류수애청유
千年老佛餘空塔 천년로불여공탑
前度詩人記某丘 전도시인기모구
牛背斜陽非淺興 우배사양비천흥
禽聲古洞儘奇游 금성고동진기유
更陪杖屨江湖去 경배장구강호거
垂柳汀沙繫小舟 수유정사계소주

[천진암에서 자면서를 시제 삼아 - 종유]

푸른 산 마주 바라보며 내가 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랴 /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조용히 들으며 맑고 고요함을 사랑하는 것뿐일세 /
천 년 묵은 늙은 불상은 어디가고 빈 탑만이 남아 있는데 /
그 전에 함께하던 옛 시인들은 아무아무의 묘들 이야기만 기억하누나 /
석양에 지는 해를 받고 있는 소 등에도 아직 흥이 남아 있는데 / 새들이 우는 오래된 산골 마을은 다 놀기 좋은 동네로다 /
이제 다시 어른들 지팡이 자욱 밟고 모시고 강가 나룻터로 내려가야지 /
버드나무가지 늘어진 모래톱 물가에는 작은 배 한척이 있겠지.




山木 洌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首夏氣布濩 수하기포호
山木交蔥蒨 산목교총천
嫩葉含朝暉 눈엽함조휘
通明曬黃絹 통명쇄황견
濃綠遞相次 농록체상차
邐迤引界線 리이인계선
松栝羞老蒼 송괄수노창
新梢吐昭絢 신초토소현
壽藤亦生心 수등역생심
裊裊舒蔓莚 뇨뇨서만연

[산과 나무를 시제 삼아 - 렬초]

초여름의 더운 기운이 널리 퍼지니 /
산의 나무들이 함께 푸르러지고 있네 /
새로 나오는 여린 잎새들은 이른 아침 햇살을 머금었으니 /
햇볕에 널어놓은 노란 명주처럼 밝게도 투명하구나 /
짙은 녹음이 서로 번갈아 차례로 더 짙어져서 /
그래도 어름어름하게 서로의 한계는 만들고 있으니 /
소나무와 전나무는 서로 더 늙어 푸르게 된 것이 부끄러하는구나 /
새로 나온 나무가지 끝에서는 새로이 고운 싹을 뱉어 내고 /
오래 묵은 등넝쿨들에게도 속마음이 새로 생기니 /
하늘하늘하면서 나무 넝쿨들은 줄줄이 뻗어 나가도다.

山木 洌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要皆非俗物 요개비속물
熙怡共幽眄 희이공유면
幸無簪組累 행무잠조누
奚復室家戀 해부실가연
躋攀旣費勞 제반기비로
享受宜自便 향수의자편
靜究生成理 정구생성리
足以當書卷 족이당서권
高秋滿山紅 고추만산홍
重來覽時變 중래람시변

[산과 나무를 시제 삼아 - 렬초]

다만 이런 모든 현상은 속된 산물이 아니므로 /
서로가 아주 조용히 서로 함께 즐겨하며 성장하노니 /
다행히도 속세의 벼슬이나 온갖 인연에 얽매임이 없으니 /
다시 방안에 들어앉아 집안일에 연연하리오 /
부여잡고 오를제 이미 수고했기에 /
기쁨을 누림이 의당 절로 만족하네 /
생성의 이치를 조용히 연구해 보면 /
충분히 서책 읽은 것과 맞먹으리라 /
온 산이 붉게 단풍 든 한가을에 /
거듭 와서 시절의 변천을 보노라.

次韻詠山木 玄谿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孟夏入山中 맹하입산중
綠溪芳草蒨 록계방초천
醉眼纈淺綠 취안힐천록
十里鋪素絹 십리포소견
茸茸不盈尺 용용불영척
石徑細如線 석경세여선
昔我童時游 석아동시유
蒼翠鬱采絢 창취울채현
全山夏木糾 전산하목규
滿谷古藤莚 만곡고등연

[산과 나무를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玄谿]

한 여름에 산 속에 들어오니 /
산골짜기 계곡 흐르는 물가에는 방초가 무성한데 /
산림 푸른 색에 취한 눈에는 모두가 옅은 녹색으로 어른거리는구나 /
십여리에 명주를 깔아 놓은 듯 /
우거진 풀은 모두 키가 한 자도 되지 않게 일정하구나 /
바위돌 사이로 뚫린 이 돌 바닥 길은 실타래 풀어 놓은 듯 가는 오솔길인데 /
그 옛날 내가 어린 시절 오르락내리락하며 놀던 길이지 /
산림의 푸른빛 무성하고 싱그러운데 /
산마다 울창한 여름 숲이 꽉 들어차고 /
골짝엔 오래 된 묵은 등넝쿨이 뒤엉켜있구나.

次韻詠山木 玄谿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日月今幾何 일월금기하
桑海驚轉眄 상해경전면
春山一蕭瑟 춘산일소슬
感我桑下戀 감아상하련
吾生亦已老 오생역이로
忘情卽爲便 망정즉위편
依遲出洞去 의지출동거
舊游懷黃卷 구유회황권
恢新期老宿 회신기로숙
物理有窮變 물리유궁변

[산과 나무를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현계]

이제 와보니 그 동안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
뽕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말마따나 그동안 놀랄만큼 많이도 변했구나 /
봄의 산기운이 쓸쓸하고 적적하게 느껴지는데 /
그래도 나는 이 정경을 사랑하는 마음 누를 수 없네 /
내 인생도 이제는 이미 늙었으니 /
정을 쉽게 잊을만도 하련만 /
걸어서 천천히 골짜기를 나가니 /
옛날의 글 친구가 책을 안고 마주 오는구나 /
노인이 잠자는 숙소라도 리라도 좀 수리하고 새롭게 단장하려 하노니 /
세상 만물이 모두 막히고 궁하면 통하여 변하게 마련이지.

次韻詠山木 楊山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玆山拔灌栵 자산발관렬
方春沃葱蒨 방춘옥총천
美惡雜礫玉 미악잡력옥
苦良混布絹 고양혼포견
杳窱風叫穴 묘조풍규혈
緯繣路穿線 위획로천선
若暆黮夕翳 약이담석예
扶光散朝絢 부광산조현
叢叢吐深秀 총총토심수
往往亘孤莚 왕왕긍고연

[산과 나무를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양산]

이 산의 물기 많은 나무들이 습기를 뽑아내니 /
봄이 한창이라서 그 푸르름이 더욱 짙어졌네 /
보기 좋고 보기 싫게 생긴 돌들이 옥돌과 섞여 있듯 /
무명과 명주가 뒤섞여 있듯 괴롭고 즐거움이 함께 하는데 /
그윽이 불어오는 바람은 산림 구렁에서 불어나오니 /
비틀뱃틀한 산속 길이 실타래 풀어놓은 듯 가늘게 뚫려 /
산림 위로 지나는 해가 저녁 그늘로 산골을 더욱 캄캄하게 하는구나 /
나무와 풀잎의 광채는 아침 햇살을 더 넓게 흩어지게 하는데 /
총총한 산림의 숲은 더욱 출중하게 수려하도다 /
나무 가지들이 종종 이리저리 혼자서 멀리 뻗기도 하였는데,

次韻詠山木 楊山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笙簧沸遞聽 생황비체청
紅綠駭觸眄 홍록해촉면
匪直千章盛 비직천장성
諒有三宿戀 량유삼숙련
因君啖蔗妙 인군담자묘
得我談龍便 득아담용편
芳縟細上衣 방욕세상의
濃翠燦盈卷 농취찬영권
復恐西灝至 부공서호지
坐見崖谷變 좌견애곡변

[산과 나무를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양산]

대나무 쪽 뚫어서 만든 손 악기 생황 소리 여기저기서 번갈아 들리는 듯 /
붉고 푸른빛들이 보는 이의 눈을 놀라게 하는구나 /
천 마디 글이라도 그침없이 나오는 것은 /
삼일 밤을 묶고 가는 정든 탓이 아니랴 /
그대의 군감자 까서 먹는 묘기를 보면서 /
내가 용을 얘기할 방편을 얻었다오 /
향기로운 풀잎새들 곱기는 옷자락 천보다 위에 있고 /
짙푸른 색과 빛은 책의 내용을 채우고도 남는데 /
다시 서풍 기운이 불어올까 두려우니 /
언덕과 계곡이 바뀌고 달라질 것을 앉아서 볼 수밖에 없으리.

次韻詠山木 學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躡履歷翠窅 섭이력취요
攪衣登空蒨 교의등공천
禪樓啞古鐘 선루아고종
佛幀颺敗絹 불정양패견
潺湲不可聞 잔원불가문
暗泉劣一線 암천렬일선
豪士昔講讀 호사석강독
尙書此燒鍊 상서차소련
芬芳旣沈歇 분방기심헐
寮院無逾莚 료원무유연

[산과 나무를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학연]

거칠고 무성한 풀속을 헤치며 걸어서 /
옷자락 펄럭이면서 썰렁한 산속 길을 올라오니 /
절간은 옛 종소리마저 온데간데 없고 /
부처 그림의 명주 천은 다 헤어져 펄럭이고 있을 뿐이네 /
옛날처럼 흐르던 흘러오던 식수용 또랑물은 흐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
겨우 실낱같은 옹달샘 하나만이 메워지지 않고 남아있구나 /
이곳은 그 옛날 호걸들과 명사들이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였지 /
중용, 대학, 서전, 주역은 우리가 여기서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
그 향학 열기들은 이미 다 사라져 아주 없어졌구나 /
기숙사는 아 무너져서 풀넝쿨이 우거져 들어가 볼 수조차 없네그려.

次韻詠山木 學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綠葉墍四山 록엽기사산
新鮮暢客眄 신선창객면
互談同異辨 호담동이변
幸絶紆拖戀 행절우타련
誰恨白首年 수한백수년
未得丹霄便 미득단소편
徑欲拔宅去 경욕발택거
手把靈書卷 수파령서권
豈能長戚戚 기능장척척
不覺日月變 불각일월변

[산과 나무를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학연]

푸른 색 나뭇잎이 사방 산림을 옷 입히듯 하였군 /
차라리 산의 푸른 색깔에 찾아온 나그네의 눈이 번쩍 뜨이고 시원해질 뿐일세 / 서로가 다 같이 다른 이야기들을 말하며 따지다보니 /
얽히고설킨 인연에 대한 정과 미련을 끊어버린 것이 다행이구나 /
백발의 늙은 나이를 원망하는 자 누군가 /
저녁노을 붉은 하늘에 올라서 편하게 지내지는 못하고 있으니 /
어서 속히 속세의 살던 집 버려두고 떨쳐 나와서 /
두 손으로 영혼의 서적들을 움켜쥐게만 되면야 /
어찌 두고두고 깊이 염려할 있으랴 /
신선처럼 해와 달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는 것도 깨닫지 모르리.



次韻詠山木 鍾儒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四月楊子山 사월양자산
草樹日蒨蒨 초수일천천
徐熙春山畫 서희춘산화
依然一幅絹 의연일폭견
澗流鳴似雨 간류명사우
石徑細如線 석경세여선
地淨禪宜棲 지정선의서
洞深丹可鍊 동심단가련
蒼鬱神杉直 창울신삼직
蒙絡古藤莚 몽락고등연

[산과 나무를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종유]

초여름 사월의 앵자산은 /
풀과 나무 모두가 날로 무성해져서 /
서희가 그린 봄날 산의 그림같으니 /
의연히 명주 한 폭의 그림이로세 /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는 비 내리는 소리와도 같구나 /
바위돌 사이로 난 돌바닥 길은 실타래 풀어 놓은 듯 가느다란데 /
땅이 정갈하니 참선수도하는 이들 깃들이기에 알맞은 곳이로다 /
마을 골짜기가 깊으니 단약을 불에 달여 만들만 하네 /
울창한 삼나무는 가락같이 곧고 /
덮이고 얽힌 건 묵은 등넝쿨일세.

次韻詠山木 鍾儒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幽尋三百曲 유심삼백곡
梵宮忽入眄 범궁홀입면
三生應夙契 삼생응숙계
一宿有餘戀 일숙유여련
我欲來此住 아욕래차주
無人示方便 무인시방편
寂寞唯佛像 적막유불상
零落但經卷 령락단경권
他年可重來 타년가중래
歎息恒沙變 탄식항사변

[산과 나무를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종유]

막힐 듯 열리기를 삼백 번이나 구불구불한 궁곡에 다달으니 /
절간 집이 갑자기 눈 속에 들어오네 /
전생과 후세와 이승의 삼생은 연이 얽히고 썩힌 짜임대로 되겠지만 /
하룻밤 묵어가는데도 정이 깃들고 미련이 남는다네 /
나는 여기에 다시 와서 머물며 아주 살고 싶으나 /
오고 가며 와서 머무는 방도와 편의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려 /
불상만이 오로지 쓸쓸하고 외로워 적막하기만 하듯 /
경서 몇 권만이 또한 썰렁하기만 하도다 /
후일에 어느 해나 또다시 여기를 오게 될지 모르지만 /
그 때 가면 더더욱 변하여 달라진 모습에 더욱 탄식만 하게 되지 않으랴.

山門 洌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每下山樓意悄然 매하산루의초연
不知重到定何年 불지중도정하년
愛玆㶁㶁雲溪水 애자괵괵운계수
十里相隨到野田 십리상수도야전

[천진암 계곡을 벗어나 산문을 나서면서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 렬초]

산루를 내려올 적마다 늘 그러했듯이 마음만 쓸쓸하구나,
어느 해에나 다시 올지 정하지 못하니 알 수가 없는데.
사랑스럽게도 이 콸콸 흐르며 난개 피우는 계곡물은 흘러서,
우리를 따라오다가 십리 쯤 와서는 잘가라고 배웅하며 전답으로 들어가네.

次韻出山門 玄谿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一出雲林意惘然 일출운림의망연
巖泉遲暮白頭年 암천지모백두년
拂衣一日入山去 불의일일입산거
何處茅廬無石田 하처모려무석전

[천진암 계곡을 벗어나 산문을 나서면서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 현계]

구름 속 산림을 나서고 보니 마음이 몹시 서운하도다.
백발의 나이가 되어 바위 샘물가에서 머뭇거리다 해 저무는데,
도포자락 벗어놓고 일단 어느 날 이런 산속으로 들어온다면,
어디를 간들 머물 초막집과 경작할 돌자갈밭이야 없으랴?

次韻出山門 鍾儒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參回繡佛意悽然 삼회수불의처연
轉眄靑山似百年 전면청산사백년
一曲憐渠淸淨水 일곡련거청정수
隨人出谷漑平田 수인출곡개평전

[천진암 계곡을 벗어나 산문을 나서면서 읊조리는 것을 시제 삼아 - 종유]

불상에게 세 번 경의를 표하고 돌아서니 마음만 서글프네,
청산에 들어와 잠깐 머문 것이 백년이나 지난 듯 하구려.
신통하고 귀엽구나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가는 사람 골짜기 입구까지 따라온 후 펀펀한 논으로 길을 바꿔 들어가네.


追和呂承旨天眞寺之作-學淵

1827년 丁若鏞 65세 때 天眞菴에서

看山不待一錢求 간산불대일전구
夏木鶯聲盡意幽 하목앵성진의유
人是會心同向子 인시회심동향자
泉如悅耳卽嵩丘 천여열이즉숭구
梵樓疊嶂成孤坐 범루첩장성고좌
粥鼓斜陽念舊游 죽고사양념구유
明日君從靑瑣去 명일군종청쇄거
阿誰重理問津舟 아수중리문진주

[여승지가 천진사에서 지은 시에 추후 화답하며- 학연]

산구경하는 데는 돈 한 푼도 안 드는데 /
여름 숲 꾀꼬리 소리에 세운은 뜻이 고요해지네 /
사람들 마음 맞아 모이니 다 같은 향자들이고 /
샘 물소리 들으니 흐믓하여 어느덧 성산에 오르네 /
겹겹이 둘러 쌓인 산봉우리들 속에 절은 외로이 자리하였는데 /
석양에 죽 먹던 북 소리 나니 같이 놀던 옛 친구가 생각나네 /
그대가 내일 조정을 향하여 떠나 버리면 /
그 누가 다시 나루터 묻는 배를 부를 사람 있으랴.




韓國天主敎會 創立先祖 遺詩

蔓川遺稿 跋文 (만천유고 발문)

『平生囚獄死免於出世三十餘星霜江山依舊靑空白雲不變影先賢知舊何處去哉不接木石之身勢轉轉倒處中憶不意移世蔓川公之行蹟儷文不少矣然不幸於燒失一稿不得見千萬意外詩稿雜錄片書有之故 劣筆於抄記曰蔓川遺稿東風解凍枯木逢春芽葉蘇生之格此亦上主廣大無邊攝理宇宙眞理如是太極而無極醒覺者如接上主之意也. 無極觀人』

[평생수옥사면어출세,삼십여성상,강산의구,청공백운불변영,선현지구하처거재아?,부접목석지신세,전전도처중,억!불의이세.만천공지행적,불소의연,불행어소실,일고부득견,시고잡록편서유지고,열필어초기,왈,만천유고,동풍해동고목봉춘,아엽소생지격,차역상주광대무변섭리,우주진리여시,태극이무극각성자,여접상주지의야.-무극관인]

번역:한 평생 살다가 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었으나, 그래도 죽음만은 면하여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3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강산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고, 푸른 하늘에 흰구름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이 없것만은, 그 옛날의 선배 성현군자들과 잘 알던 옛 친구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가버리고 없단 말인가? 아무데도 연접되지 않고 외톨이가 된 나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넘어지고 쳐박히고 하는 신세가 되어 지나는 동안에, 슬프고나, 모두가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불의에 세상을 떠났구나. 만천공의 행적 중에는 여문체로 쓰여진 글들이 적지 않았었는데,불행히도 모두 불에 살라버려서, 단 한편도 얻어보지 못하던 중에,천만 뜻밖에도 시문과 몇가지 글들이 남아 있었기에,비록 졸필로나마 \'만천유고\'라고 이름 붙였다. 동풍에 어름이 풀려 녹고, 고목도 봄을 만나면, 새로 움이 트고 싹이 나오듯이,이는 모두가 위에 계신 주님의 넒고 크신 끝없는 섭리로다.우주의 진리가 다 이와같으니,태극이 무극임을 깨닫는자는 하늘에 계신 주님의 뜻에 접함과 같도다. 무극을 관망하는 자가 쓰노라.

* 만천공은 이승훈 진사의 호다. 지금의 서울 역 뒤를 흐르는 개울을 전에는, 덩굴 풀이 많이 우거져서,\'덩굴 내\'라고 불렀는데,식자들은 덩굴풀 만(蔓)이라는 글자에 이미 풀초가 들어가 있어서,만초천(蔓草川)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만천이라고도 하였으며,그 언덕 반석방(지금의 중림동 성당 지역)에 있던 아버지 이동욱 공의 집에서 태어난 이승훈 진사는 자신의 호를 만천이라고 하였다. 마치, 정약용 선생이 자기 집 마재 앞에 흐르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것을 의미하는 열수(冽水)라고 한 것과 같다. Msgr.Byon

①李檗聖祖 殞命詩

<1785년, 殞命 直前 曠菴 李檗 聖祖 作>

巫 峽 中 峰 之 勢 死 入 重 泉 무협중봉지세사입중천
銀 河 列 宿 之 月現 錦 還 天 國 은하열숙지년금환천국

무협의 중봉에 서 있는 형세로다 /
이제는 죽어서 황천길로 가야 하나 /
은하수 별 자리에 떠오르는 달처럼 /
비단 옷 곱게 입고서 하늘나라 가노라.

②友人 李德操 輓詞

<1785년 乙巳年, 李檗聖祖 葬禮式에 若鏞 作>

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羽翮皎如雪 鷄鶩生嫌嗔
鳴聲動九宵 嘹亮出風塵
乘秋忽飛去 怊悵空勞人

신선 나라 학이 인간세에 내려오사 /
신성한 풍채를 보이셨네 /
희고 흰 날개와 깃털, 눈같이도 하얗더니 /
닭과 오리 떼들 샘내며 골부리고 미워했었네 /
울음소리 구중천을 진동시키고 /
그 맑은 목소리 풍진세에 출중하셨었지 /
어느덧 가을 되어 문득 날아가시니 /
애닲아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③李檗聖祖 欽慕詩

<1779년 前後 蔓川 李承薰 作>

襟懷灑落光風霽月之無邊 금회쇄락광풍제월지무변
思慮淸明長天秋水之相暎 사려청명장천추수지상영

옷깃에 품은 바를 모두 씻어 내리는 광풍과 제월의 무변함이여 /
생각과 마음이 모두 맑고 밝으니 장천과 추수가 서로 비춤이로다.


④李承薰 聖賢 受難詩

<1785년 蔓川 李承薰 作>


天彛地紀限西東暮 壑虹橋唵靄中 천이지기한서동모확홍교암애중
一炷心香書共火遙瞻潮廟祭文公 일주심향서공화 요첨조묘제문공

천상법도와 지상기강이 서양의 천주교와 동양의 유교를 한계 지으니 /
해저문 천지간의 구렁에 놓인 무지개다리 삼키는 안개 속에서 /
일편단심 내 신앙은 책과 함께 불 속에서 애를 태웠으니 /
이제는 저 멀리 조묘를 바라보며, 문공께 후예로서 제사 올리노라.

⑤ 李承薰 聖賢 殉敎詩

<1801년 殉敎 直前, 蔓川 李承薰 作>

月落在天水上池盡 월락재천 수상지진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있고, 물은 솟아도 못이 마르면 다하고 말리라.


니벽전(李檗傳)일부 발췌

1827년 전후 與猶堂에서 丁學術 名으로 丁若鏞 作

“무술년(1778) 광암공이 25세 되던 해 성호 이익 선생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선비들, 정씨(丁氏), 이씨(李氏)네 자제들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북경 사절단 홍군사(洪軍士)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한 상자 받아 밤낮으로 탐독한 후, 깊이 묵상 연구하고 의심 점을 다 터득한 후에는 산수가 좋은 곳을 다니며 노닐다가, 일단 광주(廣州) 앵자산사(鴛鴦山寺), 천진암에 은거(隱居)하매, 도(道)를 닦는 벗들(道友)이 무리지어(衆徒) 이르니, 공이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이들에게 받아써서 익히게 하였다.”
“기해년(1779) 광암공이 26세 되던 해 어진 벗들과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이 공을 웃어른으로 모시며(爲上),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산사에 모여들게 되니, 이때 광암 공은 기묘한 학문에 박학다식하여 천문학(天文學)과 지리학(地理學), 의학(醫學)과 복술(卜術),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지식에도 달통(達通)하여, 사람들의 질문에 흐르는 물처럼 풀어서 자상하게 답변하여, 그 문하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마치 총림(叢林)을 이루듯 하였으며 그 명성이 세간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대성당 건립 머릿돌 강복문에서
- 교황요한바오로2세

PRIMARIO NOVAE AEDIS LAPIDI
IN URBE CHON JIN AM
ECCLESIAE SACRO NATALI LOCO
IN COREA
APOSTOLICAM IMPERTIMUS BENEDICTIONEM
GREGII ILLI CONCILIATRICEM
PERENNIS DEI FAVORIS

XXI SEPT MCMXCIII
JOANNES PAULUS II

**********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1993년 9월 21일
교황 요한 바울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강론
1984년 10월 14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103위 한국순교성인 첫 축일 미사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이하 생략).”


<다블뤼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錄 序文의 우리말 번역문: 김형래 교수 번역>


朝鮮天主敎會 殉敎者들의 歷史 (집필) 計劃


제목: 극동 또는 19세기 조선 왕국 주님의 증거자들 (혹은 그 어떤 제목도 좋음)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다. 책의 제명(題銘)은 Crux de Cruce로 한다. 십자가는 십자가에 의해 세워진다(는 뜻이다). 권두언으로는 Justorum animæ in manu Dei sunt(義人들의 영혼은 천주님의 손 안에 있도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39절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alii distenti sunt 등이 커다란 글씨로 자리잡는다. 헌정사는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님께 바친다. 서론 부분에는 일본 전쟁(임진왜란) 시기의 몇몇 조선인 신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넣어야 하고, 조선에 천주교 서적들이 도입된 전말을 다루어야 하며, 끝에 가서는 생애 말년에 천주교를 처음 실천했고 분명 세례받지 못한 채, 李檗의 저 위대한 講學(les grandes conférences de Ni Pieki) 전에 세상을 떠난 홍유한의 생애에 대해 몇 마디 언급을 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전쟁(임진왜란) 때의 천주교 신자들에 관한 역사는 이곳에 없으며, 프랑스에서 교회 역사 기록들 속에서 그 편린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의 신자들은 앵베르 주교로부터 들었다면서, 당시에 차부제품 또는 부제품까지 오른 조선인이 한 사람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승이 어디서 온 것인지 찾아보아야 한다. 천주교 서적들이 조선에 도입된 전말은 매우 불분명하며, 그에 관해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다. 근거 자료가 있다면 아마 몇몇 외교인 집안의 오랜 문헌들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나서야 조금이라도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외교인들에게서 많은 문서를 빌리기가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朝鮮天主敎會 歷史는 李檗의 저 講學으로부터 시작된다(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érences de Ni Pieki,,,.)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우리 생각에, 이러한 공백들은 결코 메워지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탐구를 계속하고자 원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무엇인가 얻게 될 것이다. 일부 명문 대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들, 그리고 특히 형조의 고문서들 속에서 뒤져보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천은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간혹 가다가 어떤 작은 조각을 얻을 수 있는 일도 무척 힘이 드는 것이지만, 장차 언젠가 천주교가 허락되게 되면 끈기있고 총기있는 연구들로부터 커다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분명 섭리에 의해 우리 후계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역사에 이 나라 역사와 풍속에 관한 자료들을 끼워 넣으라는 재촉을 사람들로부터 많이 받았다. 고백하건대 우리는 이 부분을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완전히 별도의 작업을 요하게 될 그러한 일을 수행할 시간도 수단도 우리에게는 없다. 한 나라의 풍속은 눈과 귀를 통해 익히는 것인데, 이 나라에서 배척 당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 그리고 언제나 시급한 사목 업무들로 인해 이 두 가지 감각을 사용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지금처럼 갇혀 사는 처지에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에 우리에게 풍습이나 관례를 익히게 해 줄 수 있는 유식한 사람도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가 천주교를 실천하는 백성들과 접촉하는 일도 항상 스쳐 지나가듯 남몰래 이루어진다. 그러니 한 나라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한 생각을 이룬다는 것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대해 옛날에도 최근에도 많은 글들이 씌어졌다. 그 저자들마다 많은 연구를 한 다음 선의를 가지고 글을 썼으리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오늘날 부분적으로 인정되고 있듯이 수많은 사실들이 그릇된 색깔로 칠해졌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우리로 하여금 지극히 신중한 자세를 요구하고, 이 주제들에 대해 한 마디라도 꺼내는 것에 떨도록 만든다. 원한다면 순교사를 시작하기 전에 조선의 옛 왕조들과 그 분열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문민 조직과 군사 조직에 대해 먼저 몇 마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몇 쪽에 걸쳐 우리가 역대 임금들의 계보, 그리고 여러 고위직과 지방 수령직을 보여 주는 도표를 옮겨 놓은 것이 경우에 따라 무엇인가를 제공해 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무미하고 건조한 것일 것이다. 우리가 풍속에 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실로 묶은 종이에 적어 끼워놓은 것은 이용하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가 위험에 빠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역사 끝부분에서는 내용을 간단히 몇 줄로 다시 요약하게 될 것이고, 마지막 문장은 책 전체를 요약하는 te martyrum candidatus laudat exercitus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기한 자료들이 담긴 어떤 책을 읽어보면, 1631년 신미년에 북경에 사신으로 간 정두원이 Niouk Jean(Jean Luc?)이라는 이름의 97살 된 서양인을 보았는데, 아직도 건강하기 이를 데 없었고, 마치 신선들(노자를 따르는 종파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는 자들) 가운데 하나인 듯 하였다고 한다. 그 사람은 분명 리치 신부의 동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이 서양인으로부터 서양인이 만든 많은 학문 서적들, 그리고 권총, 망원경, 시계 등과 같은 진기한 물건들을 받았다.
이수(이수광?)는 호가 신풍으로 순교자 이 가롤로의 조상이며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데, 자신의 글에서 리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천주에 대한 진정한 원칙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분석하면서 동시에 교황이 지휘하는 천주교회의 체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1720년 경자년에는 또한 이이명이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그는 천주를 섬기고자 개심하려는 우리의 방법이 유생들의 종교가 권하는 방법들과 꽤 유사하며, 천주교를 노자의 종파와 동류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Foë(역자 주,불교?) 교리와 비교하고 있다.
호가 성호이고 이가환의 종조부인 이익도 자신의 글에서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천주교인들의 신(神)은 유생들의 상제(上帝)와 다를 바 없고 천당과 지옥은 Foë 교리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칠죄종을 이기기 위한 칠성덕을 다룬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 집안의 회고록들 속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천주교 서적들이 처음 도입된 것은 사신단이 일본에 갔다가 한 He에서 서양인들을 만나, 망원경과 다른 진기한 물건들과 함께 받아 가져왔다고 한다.
이름이 약용인 정 요한은 천주교가 조선에 알려진 것이 李檗의 저 講學(les conférences de Ni Pieki)이 있기 200여년 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량이라고도 불리는 홍유한의 생애

그는 1735년 또는 36년에 풍산 홍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상들은 중요한 직책을 맡았었고, 집안은 꽤 명문가였다. 어린 시절에, 유명한 이익의 가르침을 받았고 바른 행동거지를 배웠다. 1770년경 천주교 서적 몇 권을 접한 다음 희열을 느끼는 가운데 이 책들을 읽었다. 곧 바로 학문서적들을 팽개치고서 천주교를 실천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기도서가 없었고, 교회의 규칙들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일곱날마다 축일이 반복된다는 사실만을 보았고, 그때부터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이면 세속사에서 벗어나 기도와 독송에 전심전력했다. 소재(小齋)를 지켜야 하는 날도 알 수가 없었던 그는 항상 밥상 위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에 입을 대지 않곤 했으며,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음식은 다 먹어서 좋다. 그러나 마음과 눈은 언제나 가장 맛있는 것으로 향한다. 탐욕은 나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하루는 말을 타고 어딘가 가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무거운 짐을 지고 진창길을 가느라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말에서 내린 다음 노인을 억지로 말에 태우고 노인의 짐도 말에 실었다. 자신은 진창길을 걸어가느라 버선과 다른 의복들이 모두 젖었는데도 불구하고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한 번은 밭을 팔았는데, 두 달 뒤에 이 밭이 산사태로 망가져 버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내 밭의 재앙 때문에 고생한다는 것은 당치 않다고 말하면서 땅값을 전부 돌려보냈다. 땅을 샀던 사람은 돈을 받기를 사양했지만 그가 끝내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돈을 받고 말았다.
몹시 추웠던 어느 겨울 그는 혼자 방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여자 노비가 추위로 매우 고생하는 것을 보고서 자기 방에 들어와 자게 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이나 여종의 남편이나 그 일로 인해 아무런 의혹을 갖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처신이 엄격하고 공정한 사람으로 통했다.
처음에 예산에 살다가 성흥(?)으로 이주했고, 백산의 산중에 은둔하여 13년간을 살았다. 이곳에서 세상과 떨어져 조용히 종교적 수련에만 몰두했다. 그런 다음 예산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朝鮮에 있어서 천주교의 起源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을 우리가 얻어낸 자료들은 丁若鏞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丁若鏞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는데,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천주교에 관한 거의 모든 일에 처음부터 관계하였으며 거의 모든 천주교 지도자들과 인척이거나 친구 사이였다. 학문과 관직에 있어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천주교를 저버리는 나약함을 보였음에도 1801년 유배를 면치 못했다. 수년 후에 赦免을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심행위와 모범적인 苦行의 실천에 오랫 동안 온 힘을 기울였으며, 지극히 천주교신자다운 모습을 보이며 죽었다. 한 편으로 그는 天主敎에 관한 몇 가지 글을 남겼는데, 우리가 한 일은 대단히 잘 쓰여진,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나 짧은 그의 기록들을 단지 옮겨 엮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朝鮮王國에 天主敎를 胎動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는 字를 德祖라 하고 號를 曠菴이라 하는 李檗이었다. 李檗은 慶州 李씨로, 高麗朝 때부터 이미 지위가 높았던 그의 조상들 가운데에는 학문이나 벼슬로 뛰어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그의 家門은 증조부 이후로 武官職에 종사하였고, 이 새로운 부문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오고 있었다. 檗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資質을 갖추고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은 武官 벼슬을 얻는 데 필요한 활쏘기, 말타기 등의 훈련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檗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끈질기게 거부하였다. 이 일로 그는 부친의 애정을 잃었고, 부친은 지나치게 고집이 센 그의 성격을 가리키는 ‘벽’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자라면서 檗은 힘이 세고 체구가 건장해졌다. 키가 8척에, 한 손으로 백 근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활달하고 잘 생긴 그의 風采는 당당하였고 당연히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의 재주도 이처럼 뛰어난 外樣에 지지 않을 정도여서, 유창한 言辯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견줄 만하였고, 모든 면에서 월등한 智力을 타고난 그는 오직 事物의 理致와 學說의 참된 토대만을 추구하였다. 언제나 事物의 根本을 파고드는 데 몰두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經典을 공부함에 있어 그 깊은 뜻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이처럼 좋은 소질은 개인적으로는 빛나는 미래를 그에게 보장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당대의 가장 유명한 학자들이 쓴 책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고, 자신의 일에 성공을 기하기 위하여 학문에 있어 자신을 도와주고 이끌어주고자 하는 모든 지식인들과 交分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관습이나 예의에 거의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고귀하고 고상한 느낌을 주었고, 그러면서도 농담을 좋아하였으며, 직업적인 학자들을 구별시켜주는 벼슬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었다. 이상이 당시 자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李檗의 모습이다.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權哲身이 丁若銓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를 위하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하고자 어떤 절(pagode)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된 李檗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도처의 길은 눈에 덮여있었고, 거리는 백 리도 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들이 학문과 지혜를 그토록 갈망하는 열렬한 마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로 길을 떠났고, 험난한 길들을 나아가면서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지는 해도 그가 열망을 실현시키는 것을 늦추게 할 수는 없었으며,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pagode)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절(pagode)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檗은 모든 승려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奇異한 도착은 첩첩 산 중의 한 중심(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isolé) 폐허가 되어 못쓰는(perdu) 건물(édifice)에 居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卞基榮 神父 註:단어 풀이:l\'édifice isolé et perdu: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凶家나 廢刹을 의미한다. 講學 당시 天眞菴은 鶯子山 서북쪽 한 중심 계곡에 하나밖에 없는 쓰지 않는 건물이었다는 뜻이다. 폐허가 되어 못쓰는 건물에 권철신 같은 대학자가 寓居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鶯子山 동남쪽에는 불과 몇백 미터 간격으로 走魚寺, 樊魚寺, 鳳台庵, 日出庵, 石伊庵, 등이 있었으므로, “calme혹은 tranquille” 즉 “고요하고 적막한 절간”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못쓰는 건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인간본성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先賢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 위에 偉人들의 倫理經典들에 대한 硏究와 講學(les études et conférences)이 이루어졌고, 유럽사람이 漢文으로 쓴 철학서적과 수학서적 몇 권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하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마침내 연구와 토론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몇 권의 초보적인 서적에까지(이 책들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미치게 되었다. 이 서적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당시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攝理, 영혼의 靈性과 不滅性, 七罪宗을 그에 상대되는 일곱가지 德으로 물리치는 修行法 등을 다룬 몇 권의 槪論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中國經典들의 막연하고 모호한 학설에 익숙해있었어도 眞理를 渴望하던 그 곧은 사람들은 우리 聖敎의 기초원리를 검토하자마자 그 敎理에 담긴 위대하고 아름답고 확실한 모든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책이 없었으므로 이 교리를 더이상 깊이 연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즉시 감동되었고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렇듯 眞理는 언제나 그 標識를 同伴하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진리의 빛은 이를 찾는 모든 이들의 눈에 빛나고, 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리가 행복의 싹처럼 심어주는 느낌에 무감각할 수 없는 법이다. (자기 나라에서 학문에 가장 앞서가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된 것을 보자니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가!) 이리하여 지혜를 추구하던 우리 주인공들은 聖敎에 젖어들게 되었고, 그 명확한 원리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聖敎의 모든 戒律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黙想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영혼 수련에 대해 생각하면서 小齋를 지켰다. 그들이 이러한 수련을 얼마동안이나 지속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비리에 이를 행하였다. 그런데 뒤이은 사실들에 비추어볼 때 적어도 그들중 대부분은 이를 오래 지키지는 못한 듯하다.
檗의 열렬한 마음에 풍요로운 씨앗이 심어졌다. 이러한 시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는 느끼고 있었고, 그의 모든 생각과 시선은 시작된 과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中國을 향해 있었다. 이러한 조바심 가운데 몇 년이 흘렀고, 그가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바친 노력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없다. 1783년 초여름, 4월 보름날, 누이의 忌日을 맞아 마재 丁씨네에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檗은 丁氏 두 형제 若銓, 若鏞과 함께 배에 올랐다. 한양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철학적 대화와 연구였다. 조선의 책 몇 권을 검토한 다음, 그들의 정신은 서양인들의 學說에 이르렀다. 그들은 天地와 인간의 창조, 영혼의 靈性과 不滅性, 그리고 來世에 천당과 지옥에서 받는 賞罰 등의 道理에 대해 차례로 자세히 토론하였다. 모든 사람이 이 道理의 참됨을 인정하고 믿게 되었으며, 그토록 아름답고 기분좋은 진리를 처음 듣는 여행객들도 모두 놀라고 기뻐하였다. 그 무렵에 이런 토론모임이 되풀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檗의 끓는 열정이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西學 서적들에 대해서, 그리고 또한 천주교에 관한 몇 권의 서적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보았거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문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北京에 연례적으로 가던 사절단을 통해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천주교 敎理의 초보적 개념들이 널리 유포되어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의 서적들은 聖敎를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지한 마음으로 天主를 찾는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天主께서는 그해를 곧은 영혼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는 해로 삼으셨다. 그해 1783년 겨울 李東郁이 北京 朝廷에 가는 書狀官으로 임명되었고, 아들 李承薰도 따라가게 되었다. 장차 여러 해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될 이 대단한 인물에 대해 소개할 시점이 지금이다. 李承薰은 字가 子述이고, 平昌 李氏 양반 가문 출신으로, 조상들은 文官의 要職을 자주 맡았었으며, 그의 家門은 높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1756년(丙子年)에 태어난 李承薰은 열 살때부터 문장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열아홉, 스무 살에는 벌써 온 나라에 뛰어난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옛 聖賢들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李承薰은 학문과 品行이 더 나은 사람들과 교제하였으며, 學識을 높이는 일 뿐 아니라 品性을 가다듬는 데에도 애를 썼다. 李檗과도 아는 사이였지만 취향이나 성품이나 공부의 차이로 인해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내지는 못하였다. 25세 되던 1780년(庚子年)에 進士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 李檗은 承薰이 北京使節團에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며 즉시 承薰을 찾아갔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그는 李承薰에게 이런 주목할 만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자네가 北京에 다녀오게 된 것은 참된 道理를 알도록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절호의 기회일세. 萬物의 創造主이신 上帝를 恭敬하는 데 대한, 그리고 여러 聖人들에 대한 道理는 西歐人들이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네. 이 道理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心性을 바로잡을 수도 없고, 事物의 원리를 깊이 알 수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과 백성의 여러 가지 의무를 어찌 알겠는가? 그것 없이 생활의 원칙도 없고, 天地의 창조, 天體의 물리적 질서와 규칙적 運行, 兩極의 질서 등을 우리가 알지 못하네. 天使와 惡靈의 구별, 세상의 始初와 終末, 靈肉의 결합, 善惡의 理致, 죄를 赦하기 위한 天主聖子의 降生, 善人에 대한 천당 報償과 惡人에 대한 地獄罰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네.” 천주교 서적을 아직 보지 못했던 李承薰은 이러한 말에 크게 놀라고 감탄하면서 그런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는 천주의 존재와 標徵에 대한 초보서적들과 <七克>을 훑어보고 난 뒤, 행복감에 사로잡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檗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 물었다. 檗은 承薰에게 이렇게 말을 계속하였다.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되었음은 天主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표시일세. 도착하거든 바로 天主堂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生死에 관한, 즉 來世에 관한 莫重之事가 자네 손에 달려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承薰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大道師, 스승의 말씀(la parole du Maître)처럼 받아들였으며, 공동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약속하였다. 檗이 한 말을 살펴보면, 檗은 서양학문과 천주교에 똑같이 목말라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지 않은 말 속에서도, 그의 智力은 이미 천주교를 세계와 사회의 토대로 이해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이번 일이 그에게는 오직 唯一無二하게 긴요한 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그가 곧 시작하게 될 大業, 즉 처음으로 천주교의 씨앗을 전파하는 大業을 위하여 天主의 恩寵이 이 사람을 이미 준비시키신 것이다.<번역 : 김형래 교수>

(卞基榮 神父 註:단어 풀이:프랑스어 원문에 나오는 “Maître”라는 말은 영어(master), 프랑스어(maître), 이태리어(maestro), 등에서, “스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원문의 la parole du Maître 와 같이, 첫 글자를 大文字로 쓰게 되면 일반적 의미의 “스승”이라는 뜻이 아니라, 孔子, 孟子, 예수, 釋迦牟尼, 소크라테스, 같은 인류의 위대한 大聖賢君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승훈 선생이 이벽선생의 말씀을 大聖賢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

Daveluy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錄 序文의 위 우리말 번역문은 김형래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原文제목은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vol 4 (pp. 5 -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