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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문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과, 세자요한 광암 이벽,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에 관한 역사적인 여러 사실이, 지금까지 여기저기 흩어져서 파묻혀 있었거나 가리워져 있었고, 심지어는 그릇 알려져온 바도 있었다.

이에 우리는 거룩히 빛내야 할 자랑스런 이 역사를 되찾아 캐내어 밝히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묘한 기원사를 간추려서 올바르게 여기 적는다.

천주강생 1779년 기해년 정조 삼년 음력 섣달, 양력으로 1780년 정월 중순경이었다. 지금 이 위에 있는 이벽 성조 묘자리에 있던 천진암에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등과 함께 학문연구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학자 권철신이 강학회를 개최하였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벽 성조께서는 서울에서 일백여리 눈길을 걸으시어 엄동설한에 마재와 항금리를 거쳐, 강학회 주최자 권철신이 잠시 거하던 앵자봉 동편아래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하셨다. 그러나 강학회는 천진암에서 하고 있음을 아시고, 그 밤으로 길을 떠나사 눈으로 덮인 앵자산마루를 넘으시어, 한밤중 늦게서야 천진암에 이르셨고, 학자들을 만나시어 촛불을 밝히시고 경서를 담론하셨다.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이벽 성조의 강론과 논증을 통하여, 학자들은 유불선과 여러 경서에 담긴 도리를 하나 하나 비교 연구 검토하여, 우주 만물에는 조물주 천주 계심과, 사람에게는 불사불멸하는 영혼이 있고, 죽은 후에는 상선벌악을 하는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비롯하여, 천주교도리를 대강 깨닫고 믿으며, 아는 바는 즉시 실천하였다. 이 때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공경가를 지으셨고,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다. 또 권철신은 일과표와 규정을 만들어서 모든 이가 새벽이면 일어나 빙천에서 냉수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나서 숙야잠을 외우고, 해가 뜨면 경제잠을. 정오에는 사물잠을, 해가 지면 서명을 열심히 외우며 정성껏 기도하고 수련하였다.

이 때 이벽 성조와 학자들의 마음과 몸가짐은 장엄하고 신중하며 열렬하여, 규정과 법도를 어기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이승훈은 이때를 당하여 숯돌에 갈 듯 자신을 철저히 연마하였다고, 훗날 다산 정약용은 회고하며 기술하였다. 더우기 칠일마다 주일 하루는 천주공경에 바쳐야 함도 알았으나,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요일이 없었고 아직 몰랐으므로, 음력으로 따져서 매월 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스무여드레를 주일로 삼아, 온종일 대재와 소재 파공과 기구, 독경과 잠심으로 지내었다. 이러한 강학회가 처음에는 이곳 천진암에서 시작되었으나, 때로는 주어사로 자리를 옮겨서도 하였으나, 몇해동안 양쪽에서 거듭하였고, 주로 천진암에서 5년내지 7년 간 계속하였다. 이 강학회를 통하여, 이벽성조께서는 천학을 천주교로, 천주학을 천주교로, 즉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셨다.

이렇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성신의 비추심을 따라,, 누구의 권고나 가르침도 없이, 천주의 진리를 스스로 탐구하고 믿으며 실천하므로써, 여기서 한국 천주교 신앙의 움을 틔우고, 한국천주교회의 싹이 돋아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곳은 온 세계에 길이 빛낼 자랑스러운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이다. 서양의 이태리와 로마는 베드로 사도가, 동양의 일본은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전교하였다. 세계 모든 나라와 겨레들이 선교사들한테서 전교를 받았으나, 우리 겨레만은 선교사없이 성직자없이 우리 겨레 스스로의 자발적이며 창의적인 노력으로,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천주를 섬기기 시작하였으니, 천진암강학회는 바로 진리 탐구와 실천, 그 전파와 수호에 있어, 세계 모든 민족들 중에서 우리 겨레가 가장 뛰어난 정신문화 민족임을 들어내 보였다.

그리하여 이벽성조께서는 몇해동안 수차에 걸친 시도와 노력 끝에, 마침내 1783년 가을. 이승훈을 북경천주교회로 파견하시며 거룩히 훈계하시니, 이승훈은 이를 듣고 스승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겨, 영세와. 성서 성물 구입 등 부여된 사명을 정성껏 완수하고 귀국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1784년에 이벽성조께서는 온 겨레의 구원성업을 힘차게 펴시고자,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정하시어, 교회 전례거행과 도리 강론 등 눈부신 전교활동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을 튼튼히 다져나가시니, 바로 거기가 오늘의 명동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천진암 강학회와 명례방 집회를 전후하여, 이벽성조께서 친히 천주교 진리를 가르치시어 입교시킨 사람들은, 북경천주교회에 파견되었던 이승훈을 비롯하여, 권철신, 권일신 형제들, 권상학, 정약전, 정약용, 이가환, 최인길, 김종교, 최창현, 김범우 등 모두 한국천주교회 창립에 주초와 기둥으로 활약한 최초의 신도들이다.

드디어 1785년 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권일신, 권상학,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윤하, 이총억. 김범우 등 제자들이 스승이신 이벽 성조를 모시고 책을 들고 둘러앉아서, 교회 전례를 거행하며 도리해설과 그 깨우쳐 주심을 듣고 배우다가, 추조금리들에게 적발되어, 끝내는 을사박해가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가 겪은 최초의 박해였다. 이벽성조께서는 권력층의 무서운 탄압과, 문중 친척들의 살벌한 성토와 위협으로, 가족들에 의하여 집안에 감금당하시자, 방안에 들어가시어 좌정하시고 십여일 이상을 일체 식음을 전폐하사 온전히 금식하기고, 의관을 벗지 아니하시며 잠을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병환이 겹친 중에서도 계속 철야기도와 묵상과 고행으로 온갖 박해와 위협에도 굴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시며 굳세게 신앙을 증거하시면서, 칼 아래서의 순교보다도 더 어렵고 더 장렬한 죽음으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위하여 최초의 자원 희생제물이 되시니, 이것은 무혈의 순교였다.

이벽성조께서는 1754년 갑술년 영조 삼십년에 오늘의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윗두미에서, 경주 이씨 이부만공과 청주 한 씨를 부모로 여섯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어, 1785년 을사년 정조 구년 늦봄에 만 삼십일세로, 서울 수표교 부근 마을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반만년 신앙의 암흑속에서 헤매던 우리 겨레를 천주께로 인도하신 이벽성조의 찬란한 일생과 거룩하고도 장렬한 최후는,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이며 창립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니, 그 어느 겨레에도 유례가 없는 인류의 정신 문화사에 새 역사를 창조하셨다. 세자 요한 광암 이벽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조께서는 우리 배달겨레와 온 세계 만민으로부터 세세에 찬미와 영광과 존경을 받으소서.

-천진암 200주년 기념비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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